2016년 11월 21일 월요일

방화복의 내구연한은 정말 3년일까



매년 국정감사 때 마다 언급되는 주제 중에는 "노후 방화복"이 있습니다. 3년의 내구연한이 지나 기능이 떨어진 방화복을 소방관들에게 입힌다는 것이지요. 지역별로 보급율과 노후율이 표시된 자료가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다루는 언론이나 국회의원 모두 가장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아무도 "방화복의 내구연한은 왜 3년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태평양을 건너 북미로 가보겠습니다. NFPA 1851 개정 때 마다 논란이 되는 규정이 있습니다. NFPA 1851은 건물화재진압용 앙상블 (방화복, 두건, 장갑, 헬멧, 부츠)은 제조일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사용을 중지(retire)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NFPA Standard는 법이 아니며, 이를 준수할 것인지는 각 소방본부의 재량에 속합니다)

건물화재/근접화재진압용 보호앙상블의 선택, 관리 및 유지에 관한 NFPA 표준


그런데 많은 소방관들은 이 규정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미국에는 소방본부(fire department)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약 3만여곳 정도 있습니다. 이 중에는 FDNY같이 재정이 탄탄한 곳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FDNY: 방화복과 두건은 Morning Pride 제품 (PBI 계열)

대도시를 벗어나면, 미국소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10년의 내구연한을 넘겨 장비를 사용하는 곳도 부지기수이고, 방화복 한 벌을 여러명이 돌려쓰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10년이라는 내구연한이 짧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미국 방화복은 몇가지 이유로 상당히 비싸기까지 하니 새로운 장비 구매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비싼지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다시 대서양을 건너서 유럽을 보자면, 유럽은 미국과 같은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Grampian Fire and Rescue Service에서 개인안전장비 담당자로 27년 동안 일했던 Ian Moses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10년 정도 쓴 장비들도 많았다고 하네요. 

Grampian FRS의 방화복 (PBI 계열)

영국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제가 예전에 찾았던 자료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원문)
"In addition to this, firefighter PPE has an average life span of 7- 8 years, depending on the initial specification and a short term contract (4 years) would result in serviceable PPE being returned to the provider much earlier than necessary."
(번역)
"이에 더하여, 소방관의 개인안전장비는 평균적으로 7-8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초기 스펙과 짧은 계약기간(4년)에 의존하는 것은 아직 사용가능한 개인안전장비를 필요이상으로 이르게 공급업체에게 반납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약기간"은 리스(lease) 계약기간을 말합니다. 영국은 개인안전장비를 구매하지 않고 리스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자, 그러면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조일로부터 3년이 지난 방화복을 무조건 노후 제품으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을가요?

다른 모든 의류/장비와 마찬가지로, 방화복은 사용환경/관리의 영향을 받습니다. 화재현장에 자주 들어갔다 나오고, 오염되고, 자주 세탁하는 방화복은 그렇지 않은 방화복에 비해 수명이 짧습니다. 이런 방화복들이 자주 교체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방화복을 입는 소방관의 안전과 건강은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가혹하지 않은 환경에서 주로 옷장을 지키고 있었던 방화복 역시 3년의 내구연한을 적용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방화복에서 가장 취약하고 수명이 짧은 부분은 바로 방수투습천입니다. 물이 새기 시작하면 수선하거나 교체해야 합니다. 방수투습천의 수명은 어느 정도 될까요? 미국 방화복 제조사의 브로셔가 힌트를 줍니다. 북미 방수투습천의 양대 제조사인 Gore와 Stedfast는 모두 자사 제품에 3~4년의 품질보증기간을 부여합니다. 이 기간 안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다는 이야기이지요. 적절히 관리가 된다는 전제 하에 3~4년 정도는 사용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겉감은 어떨까요? 제품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겉감 역시 3~7년 정도의 품질보증기간을 부여합니다. 그 안에 발생하는 문제는 책임질 수 있다는거죠.

미국의 방화복 제조사인 Globe Turnout Gear는 홈페이지에 사용연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방화복의 겉감과 단열내피는 4~6년, 방수투습천은 2~4년 정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단 주의해야할 점은 이 사용연한이 "실제로 주기적으로 사용되면서 적절히 관리가 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잡혀있다는 것입니다. 

Globe Turnout Gear의 Serviceable Life Guidelines

개인적으로는 방화복의 내구연한을 일률적으로 두지 않고 검사를 통하여 개별적으로 노후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현재는 숫자로만 표시되는 노후율 때문에 적지 않은 소방본부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방화복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과다하게 공급된 방화복 역시도 3년이 지나면 실제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노후 방화복으로 집계되기 때문에, 노후율에 신경을 써야하는 소방본부들은 실제 필요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방화복을 구매하게 됩니다.

짧은 내구연한은 불필요한 지출을 발생시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방화복 산업 발전에도 장애물입니다. "3년만 버티면 된다."가 제조사의 마인드가 되면 더 오래가는 튼튼한 제품은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제조사간 실력차이를 확인하기에도 "제조일로부터 3년"은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디테일에 신경을 쓴 방화복과 안 쓴 방화복의 차이는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조달 시스템은 비용을 덜 들인 후자의 손을 들어주기 쉽고요.

사실 방화복의 내구연한을 늘리자는 주장이나 없애자는 주장은 소방 내부에서 나오기 어렵습니다. 언론에서 "낡은 방화복을 계속 입으라는 안전처" 같은 제목을 뽑기에 아주 좋으니까요. 하지만 덮어놓고 3년마다 새 제품을 지급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2년 사용된 방화복이라도 필요하다면 내구연한이 도래하지 않았더라도 교체해줘야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금 유연한 내구연한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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