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동복에 대해서는 엄청 불만이 많습니다. 땀이 잘 안빠지니 그대로 몸을 타고 흘러내리고, 통기성이 안좋아서 여름에는 엄청 덥고, 몇 번 빨면 구김도 잘 생기고... 이런 이야기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심각했던 것은 "기동복을 안에 입고 진압을 하고 나면, 신발 안에 물이 차서 발이 퉁퉁 붓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도 이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의 상황을 보니 우리는 좀 더 상황이 나은 것 같습니다. Station wear에 관한 표준인 NFPA 1975 인증을 받는 방염소재 station wear는 보통 Nomex IIIA를 쓴다고 합니다. 메타아라미드 93%, 파라아라미드 5%, 대전방지체 2%의 조합이지요. 이 원단에 대한 불만은 이미 1994년경에 있었습니다. 위에서 적은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불만과 같은 내용으로요. 착용감이 완전 별로다 이거죠.
We don't like it either, bros.
우리나라 소방관들이 입는 기동복에 쓰이는 조합은 메타아라미드 60%, FR레이온35%, 폴리우레탄 5%입니다. 레이온은 부드럽고 차가운 느낌을 제공하므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Nomex IIIA에 비해 국내 원단은 더 시원해야 합니다. 폴리우레탄은 작년 국정감사에서 "불붙는 기동복"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습니다만, 기동복에서의 본래 역할은 옷에 신축성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여기까지만 봤을 때는, 죽어라고 욕을 먹는 KFI가 사실은 그나마 해외의 기동복보다는 나은 옷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한 것이 엿보입니다.
억울합니다 ㅠㅠ
문제는 그렇게 만든 옷이 욕을 먹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기존의 옷은 폴리에스터로 만들었는데, 폴리에스터는 통기성도 엄청 좋고, 땀 흡수 배출도 엄청 빠르고, 착용감도 좋으니까요. 그런데 이 좋은걸 왜 바꿨냐는 말이죠.
바람 숑숑 활동복♡♡
올해 초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스노에서 소방관이 화재 가옥에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뚫는 vertical ventilation 작업을 하다가 지붕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불 속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신 70%에 화상을 입었고, 40% 이상은 2~3도 화상이라고 합니다. 일단 살긴 살았는데, 처음에는 위독한 상황이었고, 2달 정도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방화복은 꽤 많이 손상되었을 것이고요. 추락 후 구출까지 3분 정도가 걸렸다고 하는데, 어떤 방화복도 이런 긴 시간동안 착용자를 완전히 보호하지는 못합니다.
자, 그럼 이 소방관이 폴리에스터 기동복을 입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눠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폴리에스터나 나일론 같은 열가소성 수지는 고온에 노출되면 녹습니다. 녹으면 착용자의 피부에 그대로 달라붙습니다. 화상을 입는 것으로도 아픈데, 뜨겁게 달궈진 플라스틱이 몸에 그대로 붙는 것입니다. 화상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는거죠.
열가소성 수지가 아닌 다른 소재는 어떨까요? 하다못해 면이나 양모같은 소재도 고온에 노출되면 녹는게 아니라 타버립니다. PBI나 아라미드 같은 방염소재들은 어지간해서는 원형을 유지하고요. (물론 PBI가 아라미드 보다는 더 높은 온도에서 원형을 유지합니다) 결국 어떤 소재로 된 내의나 기동복을 입었는지에 따라 이런 상황에서 화상의 정도, 심하게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NFPA 1975에서는 열안정성(thermal stability) 시험을 규정에 넣고 기준을 통과한 제품에만 인증을 부여합니다. 섭씨 260도의 고온에서도 녹거나, 액화되거나, 불이 붙어서는 안된다는거죠. 이건 필수사항입니다. 오히려 방염성능은 선택사항입니다. 어차피 불을 막는 역할은 방화복이 하니까요. 기동복에 방염성능을 요구할 것인가는 각 소방본부가 결정할 사항입니다. 일부 본부들에서는 "소방관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불에 노출될 수 있으니 방염성능이 필요하다" 라고 하여 방염성능을 갖춘 기동복을 구매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본부들에서는 "그것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하여 일정수준 이상의 열안정성을 갖춘 기동복을 구매하는 겁니다.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습니다. 폴리에스터 기동복은 평상시의 시원한 착용감과 위험한 상황에서의 추가적 화상 위험을 맞바꾸며, Nomex 기동복은 형편없는 착용감 및 불편함과 위험한 상황에서의 추가적 보호를 맞바꾸는 셈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하는 기동복은 Nomex 보다는 나은 착용감과 위험한 상황에서의 보호를 추구했지만, 폴리에스터와 비교당하면서 몹쓸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대안이 없을까요? 현행 기준에서 아라미드의 비율을 줄이고, FR레이온의 비율을 늘려주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만, 성능 기준은 그대로 두되, 통기성이나 수분흡수성에 대한 기준을 추가하고 혼방 비율에 대한 규정을 폐지하면 원단 제조 업체에서 다양한 조합을 시도해볼 것 같습니다.
E의 노멕스에 비해 현저히 나은 통기성을 보여주는 PBI BaseGuard 제품들 (F, G)
끝으로 PBI 퍼포먼스 프로덕트에서는 PBI 20%, Lenzing FR 70%, Tencel 10% 조합인 PBI Baseguard를 밀고 있습니다. 폴리에스터의 편안함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Nomex 보다야 훨씬 나은 착용감을 제공하며, 현재 사용되는 기동복 원단 보다도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상 이야기를 가장한 제품 홍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