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6일 월요일

개인보호장비의 약한 고리, 방화두건

PBI 방화두건


고백하건대 저는 방화두건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방화두건은 공기호흡기의 면체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 머리, 목 부분을 열과 불로부터 보호하는 매우 소중한 장비입니다. 하지만 방화두건의 중요성은 꽤나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습니다. 방화복과 화재진압용 장갑이 규격 측면에서, 그리고 제품 측면에서 진화해오는 동안 방화두건은 "없는 것 보다는 나은" 수준으로 머물러왔습니다. 오늘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해보고자 합니다.

소방관 개인보호장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방관을 화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역할은 대개는 열방호성능(thermal protective performance, TPP)이라는 명칭으로 표현됩니다.

가령 방화복 성능기준은 방화복이 80kW/㎡의 불꽃열에 노출된 경우에도 17초 동안은 2도 화상이 생길 정도로 내부 온도가 올라가지 않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피부 표면온도가 24℃ 올라가면 2도 화상이 생긴다고 추정됩니다. 이를 열통과지수(heat transfer index, HTI)로 표시를 해보자면"HTI24 ≥ 17초"가 됩니다. "HTI24 ≥ 17초" 를 풀어서 써보자면, "섬락 수준의 불꽃열에 노출 되었을 때 방화복 안쪽 온도가 24℃ 상승하여 2도 화상이 걸리는데 17초 이상이 걸려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화재진압용 장갑의 열방호성능을 평가할 때도 비슷한 방식이 사용됩니다. 다만 화재진압용 장갑에게 요구되는 성능은 13초간 2도 화상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의 열방호성능입니다. 약간 차이가 있네요. 복잡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방화복에 요구되는 열방호성능과 장갑에 요구되는 열방호성능에 차이는 그.래.도. 용인할만 하다고 간주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방화두건에 대해서는 요구되는 열방호성능이 없습니다. 1000℃의 열이 나오는 전기로의 30cm 거리에서 원단을 두고 반대편의 온도 상승을 측정하는 열통과시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불꽃열 노출이 아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열방호성능 시험과는 다릅니다.

물론 이 시험을 통과하는 제품들 중에서도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험이 최저가 입찰 제도와 결합했을 때 두건 제조사들의 최적 선택은 시험에는 통과할 수 있으면서, 원가는 가장 낮출 수 있는, 최소한의 원자재가 사용된 방화두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90g 내외의 한겹짜리 방화두건을 씁니다.

한겹짜리 방화두건 (88g)

이제, 소방관이 건물 내부에서 섬락(flashover)을 겪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방화복은 (이론과 표준시험의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17초간 소방관을 보호해줍니다. 장갑은 (최초품질이 유지된다는 가정 하에) 적어도 13초간 소방관을 보호해줍니다. 두건은? 현재 사용되는 제품들은 (시험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북미규격인 NFPA 1971의 10초나 유럽규격인 EN 13911에서 요구하는 8초를 견딜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마 소방관이 얼굴에 2도 화상을 입는데는 5초가 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는? 다른 곳은 다 멀쩡한데 얼굴과 목만 화상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방화두건을 소방보호장비의 약한고리라고 부릅니다. 종종 두건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방관이 안면부나 목에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무엇이 이유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방화두건은 약한고리가 되었을까요? 방화복이나 장갑은 관심을 많이 받는 장비이지만 방화두건은 아닙니다. 무검사 방화복이나 목장갑 논란 같은 주목을 방화두건은 받은적이 없으니까요. 규정이 대대적으로 개정된 것도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규정 탓만 할 것은 아닙니다. KFI 인정을 받으면 같은 제품으로 간주하고 제품간 성능차이를 보지 않는 구매 관행, 최저가 입찰제도 하에서 더 좋은 제품보다는 더 싼 제품이 개발되고 생산되는 현실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KFI 인정기준을 능가하는 제품들은 일부 소방관들이 알음알음 해외직구를 통해 구할 뿐 나라장터에서는 선택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KFI 인정을 받은 두겹짜리 방화두건이지만
조달구매는 불가

산청은 PBI/Twaron 조합으로 두겹짜리 방화두건을 개발하여 KFI 인정을 받았습니다. 해외에서 판매되고 있는 PBI 두겹 두건들이 보이는 성능에 비추어보건대 이 두건은 적어도 HTI24 ≥ 10초 이상의 성능을 보일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산청은 조달 정책상의 이유 (동종 제품이 2개 이상이어야 등록) 나라장터에는 제품을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즈음 되면 대체 누구와 이야기를 해서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국민안전처에서 장갑과 방화두건의 성능기준 개선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고 합니다. 올해 말이 지나면 개선된 성능기준이 적용되기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울한 예상을 펼쳐보자면, 개선된 성능기준에 맞는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다시 그 중에서 최저가 제품들이 선택될 것입니다. KFI 인정기준을 맞추면서 원가를 최소화 하는 전략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눈이 높아져가는 현장 소방관들은 다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겠지요.

결국 좋은 제품들이 나오려면 제조사, 현장소방관, 조달제도, 개인보호장비 담당자, 성능기준이 합이 잘 맞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신뢰하고 쓸 수 있는 제품들이 (가능하면 PBI를 써서...)  지급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