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야 하는데 산불진화복에 잠시 꽂혀서 일을 내려놓고 짧게 써봅니다.
1. 표준
제조자에게 요구되는 산불진화복의 성능과 설계 요건이 있습니다. 크게 보면 북미에서는 NFPA 1977, 유럽에는 EN ISO 15384 (기존에 유럽 표준 EN 15614가 있었으나 ISO 표준으로 대체), 호주와 뉴질랜드는 AS/NZS 4824 표준(ISO 15384의 부분 변형)을 사용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산불진화대원 복제지침(2017.9)가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각 표준은 다루는 범위가 조금씩 다릅니다. NFPA 1977은 다른 NFPA 개인호보장비 표준과 마찬가지로 보호복 뿐만 아니라 헬멧, 장갑, 부츠, 쉘터 등 다른 장비들에 대한 사항도 다루고 있습니다.2. 설계
대개는 "겉감만으로 된 셔츠나 자켓에 바지" 또는 "겉감 + 라이닝으로 구성된 셔츠나 자켓에 바지"로 이뤄지며, 방수투습천이나 단열내피가 포함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유는 산불진압 활동은 건물화재 진압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시간 동안 저강도로 움직이는 활동이며, 고온의 불꽃이나 복사열에 대한 노출 위험 역시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입니다. 산불진화복이 특수방화복 처럼 두껍고, 무거우며, 방수투습천이 있으면 피로가 빨리 쌓이고 활동에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2. 성능요구수준
(1) 열방호성능
통상적으로 특수방화복이나 건물화재진압용 보호앙상블이 직접 화염 노출에 대한 방호성능을 요구성능으로 두는 것 (NFPA 1971의 Thermal Protective Performance, EN 469와 ISO 11999-3 의 Heat Transfer Index, 대한민국 소방청 소방장비 표준규격의 불꽃열방호성능시험 등)과는 달리 산불진화복 표준에서는 복사열방호성능을 주로 봅니다. 복사열방호성능시험은 복사열원에 대한 노출이 있을 때 2도 화상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소요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NFPA 1977은 21kW/m2 (0.5cal/cm2)의 복사열원에 노출시키며 RPP(Radiant Protective Performance) 최소값은 7 이상이어야 합니다. 이는 산불진화복 원단(배열층)의 성능은 해당 복사열원에 노출 시 14초 이상의 시간 동안 2도 화상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ISO 15384는 20kW/m2의 복사열원에 노출시키며 RHTI24의 최소값은 11, RHTI24-12는 4 이상일 것이 요구됩니다. mean transmission factor 라는 다른 성능요구치도 있는데, 이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국내 산불진화대원 복제지침은 복사열보호성능에 대한 부분은 ISO 15384와 같지만, 직접화염노출에 대한 방호성능도 요구합니다. HTI24는 3 이상이어야 합니다.
(2)열배출성능
NFPA 1977은 총열손실(Total Heat Loss) 최저기준을 500W/m2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높을수록 열배출이 빠른 것으로 이해됩니다. 건물화재진압용 방화복에 요구되는 최저기준은 205W/m2입니다.
ISO 15384는 투습저항성이라고도 불리는 증발열손실저항(Resistance to evaporative heat loss)의 최소성능요구치를 10m2Pa/W로 잡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작을수록 증발열손실을 덜 막는다는 뜻으로 낮을수록 열배출이 좋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특수방화복에 요구되는 최저기준은 30m2Pa/W입니다.
(3)기타 성능요건
소재 측면에서는 난연성과 내열성, 인장강도, 인열강도 등의 성능요건이 있습니다. 난연성이 없거나 열에 의한 변형이 심하거나, 내구성이 없는 소재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요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특수방화복을 산불진화복에 활용하는 것
사실 위의 내용들은 전부 이 부분을 위한 빌드업이었습니다. 가설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입는 특수방화복이 겉감만으로 위의 요건들을 충족시킨다면, 산불진화 활동 때는 내피를 떼고 외피만 입고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여기에는 예시로 들만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홍콩소방처인데요. 홍콩소방은 유럽표준 EN 469 방화복을 사용하는 많은 소방본부들이 내외피 일체형 방화복을 입는 것과 달리 내외피 분리형 방화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산불진화를 나갈 때는 내피를 떼고 나갑니다. 따라서 홍콩소방처는 방화복 구매를 위해 입찰공고를 낼 때 겉감만으로 산불진화복 표준의 성능요건을 충족시키는지도 조건으로 제시한다고 합니다.
홍콩소방처는 국내에서 PBI 방화복을 입는 소방본부들과 같은 제품인 PBI Matrix를 겉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추측할 수 있는 점은 PBI Matrix가 ISO 15384의 성능요건을 충족한다는 것입니다.
홍콩소방처의 방화복에는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자켓의 왼쪽 하단에 주황색 표식이 있는데, 이 표식은 내피를 떼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내피를 뗀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입니다. 산불진화모드(?)로 건물화재진압을 나간다면 금방 들킬 수 밖에 없겠네요.
최소성능요건만으로만 보면 방화복의 겉감만 입고 나가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방법처럼 보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고려할 사항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문제는 방화복의 겉감만 입으면 옷이 굉장히 커진다는 것입니다. 겉감과 몸 사이를 채우던 안감이 사라졌으니 좀 축 쳐진 느낌이 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 통이 지나치게 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특수방화복은 유럽 방화복에 비해 내피가 더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내피의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착용감과 활동성 측면에서 소방관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네요.
사실 홍콩의 사례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불진화를 위한 보호복은 별도로 지급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유럽은 보통은 아예 내외피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산불진화용 보호복이 따로 있어야 하고, 북미는 내외피 분리형 방화복을 사용하긴 하지만 산불진화용 보호복을 구매해서 쓰는 것이 역시 일반적입니다. Firehouse Forum의 게시판을 보면 "산불진화용 방화복이 없어서 건물화재진압용 방화복의 내피를 떼고 입었다." 라는 글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꽤 오래 전의 글들입니다. NFPA 1977의 초판이 1993년인 만큼 2022년인 현재는 산불진화용 방화복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산불진화 작업을 위해 내피를 뗀 상태로 방화복을 입었다면, 방화복 안쪽에 입는 옷은 당연히 기동복이 되어야 합니다. 활동복은 고온에 노출되면 녹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화상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면 제품 사용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추운 날씨에 장시간 활동 하는 경우 젖은 면이 체온을 빼앗아가면서 저체온증을 유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4. 뜬금없는 생각
문득 내구연한이 다 되어서 폐기하는 방화복 중 멀쩡한 것이 있으면 이걸 다시 분해+재조립해서 산불진화복으로 바꿔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특수방화복에서 대개 가장 늦게까지 제 성능을 발휘하는 부분은 겉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봉제 쪽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작업이 가능한지, 어느 정도의 비용과 품을 요구하는지 잘 모르지만, 사이즈를 줄이는 방식으로 특수방화복 겉감 -> 산불진화용 보호복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한 작업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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