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5일 수요일

미국에 방화복 제조사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이유

미국에 방화복 제조사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이유
현재 우리나라에는 방화복 제조사가 총 다섯 곳 정도이다. 산청, 하나산업, 지구, 경도, 그리고 신기방적. 진양S&P가 (다시) 시장에 진입하려고 준비하는 중인데, 이 회사까지 들어오면 총 여섯개 제조사가 경쟁하는 구조가 된다. 소방관 수가 4만명이고 한명당 2벌 방화복이 지급되야 하며, 3년에 한 번 새 방화복이 지급되어야 하는 사정을 고려하면 연간 조달규모는 약 3만2천벌 정도가 된다. 매 해 조금씩의 조정은 있고, 3년 넘게 방화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점, 내근직에게는 방화복이 잘 지급되지 않는 등의 사정을 고려하면 연간 조달규모는 약3만벌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반면 미국의 방화복 조달 시장은 110만명의 소방관 (30만은 직업소방관, 80만은 의용소방관)이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나 재구매 기간이 우리와는 달리 일률적이지 않고 두 벌 지급이 우리만큼 보편화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연간 조달규모를 정확하게 가늠하기가 어려우나 적게 잡아도 약 30만벌 정도의 규모가 나온다. 우리의 10배 정도. 그리고 이 시장에서 겨우 8~10개사가 경쟁한다. Globe와 Honeywell이 투톱이고 Lion, Fire-Dex를 위시한 추격자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규모로 보나 면적으로 보나 매우 거대한 이 시장에 왜 이렇게 소수의 방화복 제조사만 있을까? 중국만 하더라도 50개가 넘는 제조사가 있고, 유럽을 봐도 이보다 더 작은 시장 규모에 더 많은 제조사들이 할거하고 있다.
이유는 인증 비용이다. 설명을 위해 개념을 잠시 설명하자면 component는 방화복 원단의 각 배열층을 이루는 구성요소다. 겉감(outershell), 투습방수천(moisture barrier), 그리고 단열내피(thermal liner)를 각각 분리해서 말할 때 component라고 한다. composite은 이를 한데 묶은 세트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component가 하나만 달라도 다른 composite이 되기 때문에 인증을 새로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샌디에고 소방국의 2007년 구매는
겉감: PBI Matrix
투습방수천: Gore Crosstech 2-layer
단열내피: Glide
의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하나의 composite 세트고 여기서 하나의 component만 달라져도 다른 제품이 되기 때문에 따로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와 같다. 예를 들면 산청은 SCA 1203S 모델과 SCA 1203SA 모델 두 제품을 방화복 라인에 두고 있는데 이 두 모델의 차이는 겉감이 PBI(SCA 1203S)이냐 아라미드(SCA 1203SA)이냐 뿐이다.
그런데, 미국은 소방국마다 자체 규격을 두는 경우가 많고 각 component를 지정하는 사례도 많다. 단순히 NFPA 1971 인증 제품 중에 최저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방화복의 각 배열층에 무엇을 써야하는지, 반사테이프는 무엇을 써야하는지, 디자인은 어때야하고, 주머니는 어느 위치에 달려야 하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지정을 해서 입찰공고를 낸다. 그러다보니 방화복 제조사는 어떤 소방국이 어떤 composite을 원할지 예상할 수 없으므로 대단히 많은 조합에 대해서 인증을 받아둔다. Globe 사의 예를 들자면 인증을 받아둔 composite만 100개가 넘는다. (세어보다가 지쳐서 그만뒀음) 문제는 한 라인당 인증 비용이 11,000달러(1300만원) 정도라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한국에서 방화복 인증 비용은 모델당 350만원 수준이었다. (작년 방화복 사태 이전의 가격이었으니 지금은 더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Globe나 Honeywell 같은 회사는 인증 비용으로만 한 해에 1백만 달러 이상, 즉 10억원이 넘는 돈을 지불한다고 한다. 더 골 때리는 건 우리는 한 번 인증을 받으면 다음에 KFI 인정기준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계속 유효한 인증으로 남는데 반해 미국의 인증은 연간갱신을 요한다는 것이다. 매년 같은 composite에 대해서 다시 인증을 받아야 한다.
정리해보자면 미국에서는 한 해에 인증비용으로만 수억원을 날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방화복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에는 거대한 시장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숫자인 8~10개사만이 이 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소규모 신생 업체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해외 업체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건 공간이 부족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댓글 2개:

  1. 우연히 초식성표범님의 블로그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혹시 해외업체가 함부로 미국시장 진출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너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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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관리하지 않는 블로그가 된지라 댓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미국 소방시장은 우리의 생각보다 굉장히 폐쇄적인 시장입니다. 크게 보면 해외업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1. 인증비용: 유럽이나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인증비용이 높은데다가 매년 갱신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 인증비용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만큼의 매출이 나와줘야 합니다.

      2. 미국 소방관들이 보수적입니다. 신생업체에게 기회를 주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3. 딜러. 미국은 실질적인 영업의 상당부분을 딜러들이 합니다. 딜러들의 각 지역 소방본부에 대한 관계 형성 및 유지가 굉장히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딜러들은 보통 아이템 마다 제조사 한 곳 정도와 묶여있는데, 다른 제조사가 추가로 여길 뚫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딜러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그 다음 매출을 발생시키기는 어렵겠죠.

      물론 다른 나라 시장들도 해외 업체가 뚫고 들어가기에 만만치 않은 것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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