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6일 화요일

2015년 5월에 썼던 글



사진의 헬멧은 지난 달 대전 원내동 아파트 화재 때 출동했던 소방관의 헬멧입니다. 귀부분에 덮이지 않는 형태로 봐서는 구조용 헬멧이 아니라 진압용 헬멧으로 보입니다. 회색으로 보이는 부분은 안면렌즈 입니다. 소방관의 눈과 안면부 상단을 불과 열기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왜 사진 속의 안면렌즈는 투명하지 않고 회색일까요? 이 헬멧은 현장에서 고온의 복사열에 노출되었습니다. 착용한 소방관은 방화두건(후드)를 착용하고 있었음에도 귀와 목 부분에 1~2도 화상을 입었지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저는 화요일 아침에 소방헬멧과 방화두건에 대해서 알아봐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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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확인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4년 8월 11일에 개정된 소방용 구조헬멧의 KFI 인정기준 및 소방용 진압헬멧의 KFI 인정기준에는 안면렌즈 복사열 저항시험 항목이 새로이 신설되었습니다. 즉 이 개정 전에는 소방용 헬멧의 안면렌즈 부분에 대한 규정은 없었던 셈입니다. 동 규정은 7kw/m2의 복사열에 안면렌즈를 5분간 노출시켰을 때 안면렌즈 부분에 외관상 변화가 없을 것을 통과 요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사실은 1. 사진 속의 헬멧이 2014년 8월 11일 이후 KFI 인정을 받은 제품이 아니라면 이러한 변형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와 2. 만약 이 헬멧이 개정 후 공급 된 제품이라면 KFI 인정기준 개정이 가져온 헬멧의 보호성능 개선이 충분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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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의 안면렌즈에 관한 유럽기준 EN 14458:2004는 14Kw/㎡에서 8분간 노출시켰을 때 변형이 없을 것을 요건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가 추정된다고 쓴 이유는 직접 규정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으로 한 부 내려받는데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가 듭니다. 회사 법인 카드로 내려 받고 비용을 청구하고 싶으나 헬멧은 저희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비용 처리를 인정해줄지 모르겠습니다) 유럽 제품들 카탈로그를 살펴봤는데 EN 인증에 14Kw/㎡에서 8분간 노출 이야기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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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사건에서 소방관들이 화상을 입은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안면부, 목, 귀가 취약 부위로 보입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두건들에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보통은 한 겹으로 된 90g짜리 방화두건을 사용하는데, 상황이 이렇다고 이야기를 꺼내면 저희 회사의 다른 지역 직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네요. 한 겹짜리 방화두건으로는 부족하다고요. 미주와 유럽에서는 보통 두겹, 많게는 세 겹짜리로 된 방화두건을 사용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샘플 두건도 EN 기준을 통과하는 2겹 짜리입니다. 불에 닿는 바깥쪽 면은 PBI 40% + 파라아라미드 60% 조합이고, 안쪽은 메타아라미드 50% + FR 비스코스 50% 조합이지요. 안쪽면이 바깥면과 조합이 다른 이유는 안쪽에 비스코스를 사용했을 때 착용감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라네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제품은 한국에서 KFI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화두건의 KFI 인정기준은 260도의 오븐에 5분간 방화두건을 넣어두고 변형이 없을 것을 요구하는데, 비스코스가 함유된 원단은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두상 마네킹에 씌워서 같은 실험을 했을 때도 통과할 수 없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실험 설계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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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업체들은 두 겹 짜리 두건을 만들지 않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추측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장 소방관 여러분이나 구매를 담당하시는 소방관 분들은 대부분 "KFI 인정기준을 충족하면 동등한 성능을 내는 제품"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KFI 인정기준은 '최소한 이 정도의 성능은 내야한다'는 최소기준이지, 인정을 받은 제품간에 차이가 없음을 보장하는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조달 시스템은 최저가 제품이 거의 자동적으로 선택되도록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업체에서는 두 겹짜리 방화두건을 만들어봐야 소방관들에게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로는 가격 때문에 그렇고 둘째로는 분명히 착용했을 때 더 더울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한 겹에 비해서 두 겹 짜리는 더 두꺼우니 착용할 때 불편하기도 하고요. KFI 인정제도의 취지는 소방관에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품만을 시장에 나오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이 제도가 조달 시스템과 결합했을 때 내놓는 결과는 대개는 인정기준을 충족하는, 가장 싸지만 성능은 가장 떨어지는 제품이 선택되고 착용되는 가능성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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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할까요? KFI는 2009년 '특수방화복의 KFI 인정기준' 마련 시에 NFPA가 채택하고 있었던 열방호성능(Thermal Protective Performance)기준을 도입했습니다. 방화두건에도 열방호성능 기준을 도입한다면 아마도 업체들도 두 겹 방화두건을 조달시장에 내놓을 것입니다. 일정수치 이상의 TPP 성능을 제공하려면 한 겹으로는 어려울테니까요. 소방당국이 스스로 더 나은 제품을 고를 수 없다면, KFI가 인정기준을 개정함으로써 강제로라도 더 나은 제품만을 시장에 남기는 수 밖에는 없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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